Whiteboard

내가아직 아이였을때

김연수 | BOOK

사라진 과거의 불빛들이, 어떻게 지금의 나를 밝히고 있는가.

김연수,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를 읽고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사라졌다는 말은 아니다."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중에서

김연수의 이 문장은 시간의 본질을 꿰뚫는 하나의 선언과도 같다. 우리는 지나간 것은 소멸했다고 믿지만, 실은 형태를 바꾼 채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 스며들어 있음을 작가는 나지막이 일깨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손에 잡히지 않는 것, 그래서 잊었다고 착각했던 유년의 기억들이 사실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공기 중의 미세한 입자처럼 우리 주변을 맴돌며 현재의 나를 구성하고 있다는 통찰. 그것은 때로 무의식적인 선택의 순간에,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의 파동 속에서, 혹은 문득 떠오르는 찰나의 이미지로 그 존재를 드러낸다. 결국 현재의 나는 과거의 내가 겪어낸 무수한 경험과 감정의 총합이자, 보이지 않는 기억의 퇴적층 위에 세워진 집과 같다. ★ 과거는 지나간 시간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 숨 쉬게 하는 보이지 않는 심장이다.

왜 우리는 지나간 시간을 다시 불러내야 하는가

모든 것이 파편화되고 휘발되는 시대다. 어제의 이슈는 오늘의 뉴스에 밀려나고, 1분 전의 감정은 새로운 자극에 덧씌워진다. 이처럼 ‘현재’만이 유일한 시제처럼 여겨지는 세상에서, 김연수의 소설집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역주행의 고요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이 책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는 단순히 과거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쉴 새 없이 미래로 내달리느라 정작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향하는지조차 잊어버린 현대인들에게 ‘존재의 근원’을 탐사할 지도를 쥐여주기 때문이다.

김연수는 한국 문단에서 기억과 정체성의 문제를 가장 집요하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파고드는 작가다. 그의 다른 작품들, 가령 『꾿빠이, 이상』이나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에서도 알 수 있듯, 그는 흩어진 사실의 조각들을 언어로 엮어내어 한 인간의 내면 우주를 재구성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여준다. 이 소설집은 작가 스스로 “처음으로 소설 쓰는 자아가 생긴 작품”이라 고백했듯, 그의 문학적 정체성이 응축된 원석과도 같은 책이다. 1980년대 김천이라는 구체적인 시공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아홉 편의 이야기는, 단지 한 개인의 성장담을 넘어 한 시대의 공기와 그 속에서 살아 숨 쉬던 보편적인 인간의 초상을 담아낸다.

기억의 고고학: 나를 규정하는 보이지 않는 불빛들

소설집의 중심을 단단히 붙들고 있는 단편 「뉴욕제과점」에서 작가는 기억의 본질에 대한 놀라운 비유를 제시한다. 그는 유년 시절 자신을 밝혔던 빵집의 불빛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 부스러기 같은 것이 아직도 나를 규정한다는 사실은 놀랍기만 하다."

뉴욕제과점 중에서

‘불빛의 부스러기’. 이 얼마나 서정적이면서도 정확한 표현인가. 우리의 인생을 바꾼 것은 거창한 사건이나 극적인 전환점이 아닐지도 모른다. 오히려 아주 사소해서 잊고 지냈던 순간의 온기, 무심코 들었던 한마디의 말, 희미하게 남아있는 공간의 냄새 같은 자잘한 ‘부스러기’들이 모여 지금의 나라는 존재를 단단하게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김연수는 마치 고고학자처럼 기억의 지층을 파내려 가며,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한 그 미세한 빛의 파편들을 하나하나 발굴해낸다.

이는 심리학에서 말하는 ‘점화 효과(Priming Effect)’의 문학적 버전처럼 읽히기도 한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먼저 접한 정보나 경험이 이후의 생각과 행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현상 말이다. 유년 시절의 ‘뉴욕제과점’ 불빛은 작가의 삶에 따뜻하고 밝은 점화 효과를 일으킨 원형적 기억이었을 것이다. 우리 각자에게도 그런 ‘뉴욕제과점’이 존재한다. 그것은 할머니가 읽어주시던 옛날이야기일 수도, 친구와 함께 숨어들었던 동네의 낡은 아지트일 수도, 혹은 처음으로 혼자 떠났던 여행지의 가로등 불빛일 수도 있다. ★ 중요한 것은 그 빛이 지금은 사라졌다는 사실이 아니라, 한때나마 나를 밝혔다는 사실 그 자체이며, 그 빛의 흔적이 여전히 내 안에 남아 있다는 믿음이다. 이 책은 독자에게 묻는다. 당신을 규정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불빛은 무엇이냐고.

성장의 모순, 그리고 ‘지지 않는다는 것’에 대하여

김연수가 그리는 유년 시절은 마냥 따스하고 아름답지만은 않다. 그는 아이의 순수한 시선을 통해 세상의 모순과 인간 본성의 서늘한 이면을 예리하게 포착해낸다. 특히 「첫사랑」에 등장하는 한 문장은 그 서늘함의 정점을 보여준다.

"아름다운 것을 보고 망쳐버리는 동물은 사람뿐이야."

첫사랑 중에서

아름다움을 동경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파괴하고 싶어 하는 인간의 이중성. 순수해야 할 유년기에 이 모순을 목격하는 것은 깊은 상처를 남긴다. 작가는 성장이라는 과정이 단순히 지식과 경험을 쌓아가는 과정이 아니라, 세상의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끌어안으며 내면의 균열을 견뎌내는 일임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어른들의 이해할 수 없는 세계, 관계 속에서 겪는 미묘한 배신감, 이유 없는 폭력과 상실은 아이를 어른으로 만드는 혹독한 통과의례다.

만약 우리가 성장을 오직 긍정적이고 밝은 과정으로만 이해하려 든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우리는 삶의 불가피한 어둠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질 것이다. 타인의 악의를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 안의 파괴적 충동에 당황하며, 세상의 부조리에 쉽게 냉소주의로 빠져들게 될 것이다. 김연수가 이 소설집의 마지막을 미야자와 겐지의 시를 떠올리게 하는 「비에도 지지 말고 바람에도 지지 말고」로 맺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는 인간과 세상의 어두운 면을 충분히 보여준 뒤에야 비로소 진정한 용기에 대해 말한다. ★ 여기서 ‘지지 않는다’는 것은 비바람을 피하거나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그것을 맞으면서도 끝내 쓰러지지 않고 자신의 삶을 지켜내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그것이야말로 성장의 모순을 통과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단단한 희망의 메시지다.

나의 ‘뉴욕제과점’을 찾아서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나의 유년 시절을 부지런히 되짚었다. 나에게도 과연 ‘뉴욕제과점’과 같은 원형적 공간이 있었을까. 한참을 생각한 끝에 떠오른 곳은 동네 어귀에 있던 작은 책 대여점이었다. 쿰쿰한 종이 냄새와 빽빽하게 들어찬 책들, 그리고 늘 무심한 표정으로 카운터를 지키던 주인아저씨. 그곳은 나에게 세상으로 통하는 거의 유일한 창문이었다.

어느 날, 나는 빌리려던 만화책들 사이에 엉뚱하게 끼어 있던 낡은 세계문학전집 한 권을 발견했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었다. 호기심에 책을 펼쳤지만, 열 살 남짓한 아이가 이해하기엔 너무나 어려운 내용이었다. 며칠을 끙끙대다 결국 책을 반납하러 갔을 때, 주인아저씨는 처음으로 나에게 말을 걸었다. “그 책은 좀 어렵지? 그래도 끝까지 읽어보려고 한 게 기특하네.” 그 무심한 칭찬 한마디가 내 안에 어떤 ‘불빛’을 켰던 것 같다. 나는 그날 이후로 어려운 책에 도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고, 문학을 평생의 친구로 삼게 되었다.

책을 읽기 전의 나는 그 책 대여점을 그저 추억의 한 조각으로만 여겼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난 후, 나는 그곳이 단순한 장소가 아니라 나의 정체성을 만든 ‘불빛의 근원지’였음을 깨닫게 되었다. 주인아저씨의 그 한마디는 내 안에 잠들어 있던 지적 호기심과 성취욕을 일깨운 ‘점화 장치’였다. ★ 이 책은 과거를 돌아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나를 해부하는 날카로운 메스를 쥐여준다. 잊고 있던 기억의 파편들이 실은 지금의 나를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동력이었음을, 이 책을 통해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나는 이제 내 삶의 다른 ‘불빛 부스러기’들을 찾아 나서는 긴 여행을 시작할 용기를 얻었다.

지나간 시간은 사라지지 않고, 우리를 비춘다

김연수의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는 한 편의 아름다운 시이자, 한 인간의 내면에 대한 깊이 있는 탐사 보고서다. 작가는 유년의 기억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빛과 어둠, 성장과 상실, 개인과 시대라는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눈부시게 펼쳐 보인다. 책장을 덮고 나면, 단순히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었다는 감상을 넘어 ‘나’라는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결국 우리는 모두 자신의 과거가 쏘아 올린 빛의 잔상으로 현재를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그 빛이 희미해졌다고 해서, 심지어 그 빛의 존재를 잊었다고 해서 그 힘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우리에게 자신의 내면으로 깊이 침잠하여, 한때 나를 밝혔으나 지금은 잊힌 그 불빛들을 다시 찾아보라고 따뜻하게 권유한다. 그 기억의 고고학이야말로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 나 자신을 잃지 않고 단단하게 바로 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지 모른다.


이런 고민을 가진 분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지금의 내가 되었는지 혼란스러운 분. 과거의 상처 혹은 아름다웠던 기억에 발목 잡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분.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만의 고유한 이야기를 발견하고 싶은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은 더없이 따뜻하고 지혜로운 안내자가 되어줄 것이다.

【지혜의 갈무리】

책을 선택한 이유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고 미래만을 향해 달려가는 시대 속에서, ‘나’라는 존재의 뿌리를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이 책은 과거를 돌아보는 행위가 단순한 추억 여행이 아니라, 현재의 나를 이해하고 미래를 살아갈 힘을 얻는 가장 근원적인 성찰의 과정임을 일깨워줍니다. 자기 자신과 깊은 대화를 나누고 싶은 이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책입니다.

저자 소개

김연수는 기억, 시간, 언어의 문제를 누구보다 아름답고 지적인 문장으로 탐구하는 소설가입니다. 이 소설집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는 그가 ‘자연인 김연수’의 경험을 넘어 ‘소설가 김연수’로서 이야기의 힘만으로 독자와 소통하려는 작가적 자의식을 확립한 중요한 작품입니다. 그의 문학 세계의 출발점이자 정수가 담겨 있는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추천 대상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 청년, 문득 삶이 공허하게 느껴지는 중년, 그리고 유년의 기억을 따뜻하게 반추하고 싶은 모든 세대에게 권합니다. 특히 글을 쓰는 사람이거나, 한 인간의 내면이 어떻게 하나의 이야기로 구성되는지에 관심이 많은 독자라면 김연수 작가의 섬세한 문장과 깊이 있는 통찰에 큰 감명을 받을 것입니다.

지혜의 요약

1. 현재의 나는 과거의 경험 중 잊힌 아주 사소한 ‘불빛의 부스러기’들이 모여 만들어진 존재다.

2. 진정한 성장은 세상의 아름다움과 추함, 빛과 어둠을 모두 끌어안고 그 모순을 견뎌낼 때 이루어진다.

3. 삶의 비바람 속에서 ‘지지 않는다’는 것은, 모든 것을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나 자신을 지켜내겠다는 용기를 내는 것이다.

참고 도서

내가아직 아이였을때 / 저자: 김연수 / 출판사: Whiteboard Publishing

저작권 고지

본 콘텐츠는 독자의 인사이트와 성찰을 담은 창작 에세이입니다. 원저작물의 내용을 그대로 전달하지 않으며, 독자의 시각으로 재해석한 감상과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원저작물의 저작권은 저자 및 출판사에 귀속되며, 본 에세이는 해당 저작물과 독립적인 2차 창작물입니다.

© Whiteboard — All Rights Reserved

같이 읽기 좋은 인사이트

1984 조지 오웰

감정의 설계자들 PART 2. Whiteboard Original Series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김연수